진 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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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 정후는 진나라의 제후로, 진 여후의 아들이다. 기원전 859년 여후의 뒤를 이어 진후로 즉위했으며, 기원전 841년에 사망하여 아들 희후가 뒤를 이었다. 정후 재위 17년에는 서주 이왕의 폭정으로 공화 사건이 일어났다. 1992년 발굴된 묘지에서 부친에게 헌납된 청동기가 발견되었으며, 이 묘가 정후의 묘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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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정후 | |
---|---|
기본 정보 | |
작위 | 후작 |
국가 | 진 |
재위 기간 | 기원전 858년 – 기원전 841년 |
이전 | 여후 |
다음 | 희후 |
아버지 | 여후 |
자녀 | 희후 |
본성 | 희(Jī, 姬) |
휘 | 의구(Yíjiù, 宜臼) 또는 희보(Xǐfù, 喜父) |
사망일 | 기원전 841년 |
시호 | 정후(靖侯) |
가문 | 희(姬) |
왕조 | 진 |
2. 생애
진나라 여후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원전 859년, 여후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정후가 진후로 즉위했다.[1]
정후 17년(기원전 842년)에 서주 이왕이 포악하여 주나라 국인들이 왕을 쫓아내고 대신 공백 화와 소공이 주축이 되어 다스리는 공화(共和) 사건이 일어났다.[3]
정후는 이듬해(기원전 841년)에 죽어 아들 희후가 뒤를 이었다.[3]
1992년 발굴된 북조촌 진후 묘지 중, “진후희보반”(晉侯喜父盤) 등 돌아가신 부친 “날후”(剌侯)에게 헌납된 청동기가 발굴된 묘가 있다. 고대 한어에서 “날”(剌)은 “여”(厲)와 통하기 때문에, 이 묘가 여후의 아들인 정후의 묘로 여겨진다.[4]
2. 1. 즉위와 통치
아버지 진 여후의 뒤를 이어 진후가 되었다. 진정후 17년(기원전 842년)에 서주 이왕이 포악하여 주나라 국인들이 왕을 쫓아내고 대신 공백 화와 소공이 주축이 되어 다스리는 공화(共和) 사건이 일어났다.[3]정후는 이듬해(기원전 841년)에 죽어 아들 희후가 뒤를 이었다.[3]
1992년 발굴된 북조촌 진후 묘지 중, “진후희보반”(晉侯喜父盤) 등 돌아가신 부친 “날후”(剌侯)에게 헌납된 청동기가 발굴된 묘가 있다. 고대 한어에서 “날”(剌)은 “여”(厲)와 통하기 때문에, 이 묘가 여후의 아들인 정후의 묘로 여겨진다.[4] 기원전 859년, 여후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정후가 진후로 즉위했다.[1]
2. 2. 공화정 시기
진 여후의 뒤를 이어 진후가 되었다. 진정후 17년(기원전 842년)에 서주 이왕이 포악하여 주나라 국인들이 왕을 쫓아내고 대신 공백 화와 소공이 주축이 되어 다스리는 공화(共和) 사건이 일어났다.[3]정후는 이듬해(기원전 841년)에 죽어 아들 희후가 뒤를 이었다.[3]
1992년 발굴된 북조촌 진후 묘지 중, “진후희보반”(晉侯喜父盤) 등 돌아가신 부친 “날후”(剌侯)에게 헌납된 청동기가 발굴된 묘가 있다. 고대 한어에서 “날”(剌)은 “여”(厲)와 통하기 때문에, 이 묘가 여후의 아들인 정후의 묘로 여겨진다.[4]
2. 3. 사망과 계승
정후는 아버지 진 여후의 뒤를 이어 진후가 되었다. 기원전 842년에 서주 이왕이 포악하여 주나라 국인들이 왕을 쫓아내고 대신 공백 화와 소공이 주축이 되어 다스리는 공화(共和) 사건이 일어났다.[3]정후는 이듬해(기원전 841년)에 죽어 아들 희후가 뒤를 이었다.[3][1]
1992년 발굴된 북조촌 진후 묘지 중, “진후희보반”(晉侯喜父盤) 등 돌아가신 부친 “날후”(剌侯)에게 헌납된 청동기가 발굴된 묘가 있다. 고대 한어에서 “날”(剌)은 “여”(厲)와 통하기 때문에, 이 묘가 여후의 아들인 정후의 묘로 여겨진다.[4]
3. 양설씨와의 관계
양설씨는 진나라에서 유래했다. 진 경후의 아들인 백교의 후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진 헌후 시대에 백교의 손자 돌(突)은 양설 지역을 하사받아 양설씨의 시조가 되었다. 양설은 현재의 홍동현과 친현에 해당한다.
참조
[1]
서적
史記
[2]
논문
晋侯墓地的発現与研究現状
[3]
서적
사기 권39 진세가제9
http://zh.wikisource[...]
[4]
간행물
北趙 晉侯墓地의 年代와 性格 試論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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